유대계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기술복제시대에 예술 작품의 아우라가 붕괴된다고 지적한지 88년이 지났다.
예술 작품이 지닌 ‘제의가치’는 점차 사라지고 감각적인 표면의 가치인 ‘전시가치’만이 살아남게 된다는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했다.
물론 그동안 기술은 거듭 발전했고, 새로운 매체도 여러 차례 등장했기에 ‘아우라’를 고정적인 개념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평면 회화가 지녔던 고상한 가치는 예전보다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예술은 더 이상 상급층만 향유하는 사치품이 아니고, 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숭고하고 고귀했던 예술에 대한 이미지는 오늘날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대중은 예술을 접하기에 용이해졌고, 대중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현대 예술은 상업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물론 고전 미술이라고 해서 상업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에나 예술은 늘 상업성을 띠고 있다.
공식 예술품 시장이 부재했던 르네상스에도 예술은 상업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당시 예술가들은 소위 ‘공예가’의 자세를 취하며 예술품의 고객이었던 교회, 귀족, 군주를 응대해야 했다.
레오나드로 다 빈치는 <암굴의 성모>(1485)를 그릴 당시 작품의 내용, 색감, 제작 완성 날짜, 수선 보증 등 의뢰인이 요구하는 사항을 명확하게 파악한 후 제작에 들어갔다.
자신의 예술성을 고수하려 노력했던 미켈란젤로도 마찬가지로 의뢰인의 요구를 최대한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이었다.
예술가 본인의 모티브보다는 의뢰인의 취향에 맞춰 작품을 제작하면서 이들은 생계를 유지하였다.
예술의 상업적인 특징은 16세기 독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독일 작센의 궁정화가였던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513~1537)는 그림을 대량으로 제작하여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였다.
크라나흐는 의뢰인과 계약한 기간까지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는데 그 중 자신의 공방에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며 분업을 통해 대량생산을 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한 방법이었다.
한편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술과 공예의 개념은 분리되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에는 예술품 시장의 형성과 함께 화랑들이 생겨나면서 보다 노골적으로 상업성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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